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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형의 미망인을 선택했다
황금연휴의 첫날, 도현은 유독 신신당부했다. 두 시간쯤 늦게 출발하라고. 자신이 먼저 펜션에 체크인을 해둘 테니 서두르지 말라는 배려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고, 나는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예정보다 일찍 프런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주희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도현을 보았다. 나를 발견하고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잡은 손을 놓지도 않았다. "서윤아,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몇 초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주희가 그의 등 뒤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서윤 언니, 괜찮으시면 옆 방 쓰실래요?" "은우가 밤귀가 워낙 밝아서요. 깨면 자꾸 아빠를 찾는데, 언니 피곤하실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품에 안고 달려와 도현의 품에 익숙하게 안겼다. "아빠, 엄마가 오늘 우리 다 같이 큰 침대에서 잔대요." 도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방 카드를 내밀었다. "결혼 10주년이야.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 나는 복도에 멈춰 선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주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것 봐요. 내가 안 보챌 거라고 했잖아." 도현이 낮게 흘린 대답 소리가 들렸다. 내 철듦을, 그 얌전함을 칭찬하는 듯한 나른한 어조였다.
챕터 (1)
第1章
황금연휴의 첫날, 도현은 유독 신신당부했다. 두 시간쯤 늦게 출발하라고. 자신이 먼저 펜션에 체크인을 해둘 테니 서두르지 말라는 배려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고, 나는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예정보다 일찍 프런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주희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도현을 보았다.
나를 발견하고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잡은 손을 놓지도 않았다.
"서윤아,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몇 초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주희가 그의 등 뒤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서윤 언니, 괜찮으시면 옆 방 쓰실래요?"
"은우가 밤귀가 워낙 밝아서요. 깨면 자꾸 아빠를 찾는데, 언니 피곤하실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아이가 장난감 자동차를 품에 안고 달려와 도현의 품에 익숙하게 안겼다.
"아빠, 엄마가 오늘 우리 다 같이 큰 침대에서 잔대요."
도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방 카드를 내밀었다.
"결혼 10주년이야.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
나는 복도에 멈춰 선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주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것 봐요. 내가 안 보챌 거라고 했잖아."
도현이 낮게 흘린 대답 소리가 들렸다. 내 철듦을, 그 얌전함을 칭찬하는 듯한 나른한 어조였다.
1.
손에 쥔 방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대로 프런트로 돌아가 환불을 요구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직원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열린 창문 틈으로 사나운 빗줄기가 들이쳤다. 직원은 곤란한 기색으로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을 가리켰다. 폭우로 인한 도로 통제 안내문이었다. 내 표정보다 직원의 안색이 더 어두웠다.
산길이 막혔고, 버스마저 끊겼다. 방을 빼더라도 갈 곳이 없었다.
나는 로비 한가운데에 서서 두 개의 무거운 캐리어를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안내판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늘조차 나를 보내주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남아서 끝까지 봐주지. 이 삼류 연극을 두 사람이 얼마나 더 정성껏 이어갈지.
내게 배정된 싱글룸은 주방 바로 뒷방이었다. 창문은 뻑뻑해서 열리지도 않았고, 침대는 몸을 한 번 돌리기조차 버거울 만큼 비좁았다.
예약할 때, 나는 도현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창가가 보이고, 침대는 넓고, 조용한 방이어야 한다고.
10년 전 그는 약속했었다. 앞으로 여행을 갈 때마다 무조건 창가 쪽 자리는 내 차지라고. 내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밖 풍경을 보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지금, 그 창가 방도, 넓은 침대도 모두 주희의 차지가 되었다. 심지어 내 남편마저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캐리어를 좁은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벽 너머로 은우의 맑은 웃음소리가 새어 들었다.
"아빠, 오늘 밤엔 가운데서 자야 돼!"
도현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소리도 들렸다.
"그래, 우리 은우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도현의 문자였다.
[일단 좀 쉬어. 저녁은 같이 먹자.]
나는 답장을 보냈다.
[그 '같이'라는 게, 단란한 세 식구에 나라는 이방인 한 명 끼워 넣겠다는 뜻이야?]
답장은 30초가 지나서야 도착했다.
[비꼬지 마.]
헛웃음이 나왔다. 주희와 그 아이에게 밀려 허름한 단칸방으로 쫓겨난 건 나인데, 그는 도리어 내가 비꼬아 말한다며 타박하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주희가 과일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서윤 언니, 도현 오빠가 언니 오는 길에 피곤했을 거라고 이거라도 좀 먹으래요."
나는 손도 까딱하지 않았다. 주희는 민망한 듯 접시를 내밀며 덧붙였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오빠랑 저,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은우가 워낙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오빠는 그냥 애가 안쓰러워서 챙겨주는 것뿐이에요."
나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애가 안쓰러워서 내 남편이 네 손까지 잡아?"
주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아까 프런트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가 짐을 놓칠 뻔했거든요. 오빠는 그냥 잡아준 것뿐이에요."
문득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에 매여 있는 붉은 실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했다.
7년 전, 내가 도현에게 직접 땋아 주었던 커플 팔찌였다. 그때 그는 유치하다며 서랍에 던져두었고, 그 후론 통 보이지 않아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그 팔찌는 주희의 손목에서 주인을 찾은 듯 빛나고 있었다.
은우가 주희의 뒤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아줌마, 우리 엄마한테 화내지 마세요!"
주희는 황급히 주저앉아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은우야, 괜찮아. 서윤 아줌마가 그냥 기분이 안 좋으셔서 그래."
그때 계단에서 올라오던 도현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윤아, 애 앞이다."
나는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난 눈 먼 장님이라도 돼야 하니?"
도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여행 온 거잖아.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지 마."
"그 '모두'라는 사람들에 나는 포함되어 있기는 해?"
내 질문에 그는 2초간 침묵했다. 주희는 그 틈을 타 자연스럽게 도현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도현 오빠, 됐어. 나랑 은우는 방에 들어갈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몸짓이었고, 도현 역시 피하지 않았다.
문득 우리가 더 젊었을 적이 스쳐 지나갔다. 시댁에서 시부모님의 날 선 말에 눈물을 참던 나를, 도현은 부모님 앞에서도 꿋꿋하게 내 앞을 막아서며 지켜주었었다.
'우리 서윤이 힘들게 하는 사람은 내 부모라도 안 봐요.'
그렇게 호기롭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이 변하니, 그가 뱉던 약속도 모조리 변했다.
저녁 식사를 앞두고, 펜션 사장이 예약 명부를 들고 다가왔다.
"민도현 고객님, 패밀리 스위트룸 하나랑 싱글룸 하나 예약하신 거 맞으시죠?"
나는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울대가 잘게 떨렸다. 주희가 가로채듯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사장님. 수고 많으세요."
사장이 나를 힐끗 보며 물었다.
"아, 그럼 이분은...?"
도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제 아내입니다."
사장은 멍한 얼굴로 주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이내 어색한 침묵 속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때 도현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은우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이 사람은 그냥 아줌마고요, 우리 엄마는 여기 있어요!"
로비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웰컴 과일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주희가 비명을 지르듯 내 이름을 불렀다.
"서윤 언니!"
도현이 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한서윤, 너 적당히 좀 해. 미쳤어?"
나는 그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민도현, 결혼 10주년 저녁 식사 자리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한지 똑똑히 보고 싶어서 그래."
그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꼭 이래야겠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 오늘 제대로 눈치 없는 불청객 노릇 해보려고. 너희 눈부신 세 식구가 얼마나 다정하게 노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으니까."
2.
식탁 위, 주희는 도현의 왼쪽에, 은우는 그의 오른쪽에 앉았고, 나는 그들의 맞은편에 덩그러니 배치되었다. 직원이 생선 요리를 서빙하자, 도현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손길로 가시를 바르기 시작했다. 가장 부드러운 살점은 은우의 앞접시로, 또 다른 통통한 조각은 주희의 밥공기 위로 올라갔다.
주희가 그런 도현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도 좀 먹어."
도현이 짧게 대답했다.
"어."
나는 그의 젓가락 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전의 그도 내게 생선 가시를 발라주곤 했다. 칠칠치 못하다며 장난스레 핀잔을 주면서도 손길만큼은 정성스러웠다. 나는 그게 오직 나만을 향한 특별한 사랑인 줄 알았다. 이제야 알겠다. 그의 다정함은 내가 아니어도 흘러넘치는 것이었다는 걸.
주희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생선 접시를 슬그머니 내 쪽으로 밀었다.
"서윤 언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은우가 어릴 때부터 워낙 도현 오빠를 아빠처럼 따라 버릇해서 그래요."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어릴 때부터'가 구체적으로 언제부턴데?"
도현이 컵을 입가로 가져가려다 멈칫했다.
"은우가 많이 아파서... 내가 몇 번 들여다본 거야."
은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섰다.
"몇 번 아니에요! 아빠는 내 생일 때마다 항상 왔는걸요."
나는 도현을 쏘아보았고, 그는 교묘하게 내 시선을 피했다.
주희가 깜짝 놀라 은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애가 뭘 몰라서 헛소리하는 거예요."
은우가 억울하다는 듯 주희의 손을 뿌리쳤다.
"헛소리 아니야! 아빠가 그랬단 말이야. 나중에 나 더 크면 엄마랑 나 데리고 바닷가 근처 예쁜 집에서 같이 살자고!"
주변 테이블의 이목이 우리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도현이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
"은우야, 밥 먹어."
내가 피식 웃었다.
"애 잡지 마. 적어도 당신보단 저 애가 백배는 더 솔직하니까."
도현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윤아."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고 앨범 앱을 열었다.
"내가 기억력은 나쁜데, 다행히 휴대폰 사진첩은 참 똑똑하더라고."
액정 너머로 한 장의 사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7년 전, 어느 산부인과 병실. 갓 태어난 은우를 품에 안은 주희와 그 곁을 든든하게 지키고 선 도현의 모습. 그리고 그의 손목에는 내가 밤새워 땋아 주었던 그 붉은 실팔찌가 선명하게 채워져 있었다.
바로 그날, 나는 전혀 다른 병원에서 자궁 소파수술을 받고 있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내 곁을 지키며 울어주던 사람은 내 절친 채영이뿐이었다. 도현은 타지에 출장을 와 있어 도저히 갈 수 없다고 울먹였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진 한 장이, 그가 7년 동안 쌓아 올린 견고한 거짓말의 둑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있었다.
주희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도현이 당황해 내 휴대폰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으나, 내가 한발 빠르게 뒤로 뺐다.
"손대지 마. 더러워."
그의 턱 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너... 언제 내 뒷조사까지 하고 다닌 거야?"
기가 막혀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남의 여자 아이를 안고 기념사진까지 찍어둔 주제에, 이제 와서 뒷조사 타령이야?"
주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현 오빠, 그만해... 서윤 언니가 마음에 상처가 커서 그래요."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너야말로 그 입으로 언니, 언니 하지 마. 우리 엄마는 딸 하나밖에 안 낳았어. 너같이 가증스럽게 내숭 떠는 동생은 둔 적 없어."
주희의 낯빛이 완전히 굳어졌다. 겁에 질린 은우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나 저 아줌마 싫어!"
도현은 다급히 아이를 안아 올리며 등을 토닥였다.
"은우야,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싸늘하게 물었다.
"애가 뭐가 무서운데? 법적 아내인 내가 자기 가짜 아빠를 뺏어갈까 봐 두려워?"
도현이 결국 폭발했다.
"한서윤, 작작 좀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긋지긋하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주희 역시 급하게 일어서려다 찻잔을 건드렸고, 잔에 차 있던 뜨거운 찻물이 그대로 그녀의 손등으로 쏟아졌다. 주희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먼저 도현의 눈치부터 살폈다.
"나, 난 괜찮아 오빠... 서윤 언니 원망하지 마."
실소가 튀어 나왔다.
"찻잔은 네 손에 쥐여 있었고, 난 이 넓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무슨 초능력이라도 부렸다는 거야?"
지켜보던 사장 아내가 보다 못해 한마디 거들었다.
"내가 똑것도 봤는데, 본인이 손을 떨다 쏟은 거예요."
주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도현은 오직 나만을 차갑게 노려볼 뿐이었다.
"서윤아, 너 언제부터 이렇게 모질고 비뚤어졌어?"
가슴속이 무언가로 꽉 막힌 듯 턱 막혀왔다. 옛날의 그는 나더러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라고 했었다. 이제는 그저 뼈아픈 진실을 입에 올렸을 뿐인데, 순식간에 모진 여편네 취급을 받는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현은 제 재킷을 벗어 주희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내게 우산 하나를 건넸다.
"너 먼저 방에 들어가 있어."
우산 손잡이에 새겨진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부부가 되던 그날, 함께 조각했던 결혼 기념일이었다.
내가 물었다.
"당신은 안 들어와?"
은우가 칭얼대며 그의 옷자락바지를 붙잡았다.
"아빠, 나랑 같이 별님 조명 보기로 했잖아."
주희가 짐짓 양보하는 척 도현을 만류했다.
"도현 오빠, 서윤 언니 따라가 봐. 은우는 내가 어떻게든 달래볼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손가락끝은 그의 옷소매를 꽉 움켜지고 있었다.
도현은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 내게 말했다.
"먼저 가."
우산을 받아 쥐었다.
"민도현, 지금 나와 함께 방으로 돌아간다면 오늘 밤 일은 더는 묻지 않을게."
그의 얼굴에 찰나의 갈등이 스쳐 갔다. 그 순간 은우가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아빠,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도현이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서윤아, 나 좀 숨 쉬게 해줘."
우산 손잡이를 잡은 손목에 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알았어."
빗속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울먹이는 주희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나 때문에 오빠가 또 곤란해졌네."
도현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네 잘못 아니야."
순간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 잘못한 건 나였구나.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것, 아직도 그를 걱정하며 마음 졸인 것, 그리고 여전히 그를 내 남편이라 여겼던 내 미련이 모두 잘못이었다.
3.
깊은 밤, 묵은 위염이 도져 위가 쥐어짜듯 아파왔다. 캐리어를 샅샅이 뒤졌지만, 늘 챙기던 비상약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약통이 도현의 가방에 들어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평소 칠칠치 못한 나를 타박하며, 평생 네 약 수발은 자기가 들겠다며 매번 제 가방 깊숙이 약을 챙겨 넣던 그였다. 평생이라는 가벼운 약속은, 함부로 믿는 게 아니었다.
쓰라린 배를 움켜쥐고 그에게 톡을 보냈다.
[내 약 당신 가방에 있어. 나 위가 너무 아파.]
10분이 지나서야 짧은 답장이 왔다.
[은우 이제 겨우 잠들었어. 방 문 두드리지 마.]
빛나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통증이 명치끝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잠시 후, 추가 메시지가 도착했다.
[좀만 참아봐.]
나는 가디건을 대충 걸쳐 입고 약을 사기 위해 방을 나섰다.
빗소리는 여전했고 로비 프런트엔 아무도 없었다. 근처 편의점까지 빗속을 뚫고 걸어가 상비약과 뜨거운 생수 한 병을 샀다. 다시 펜션으로 돌아와 복도를 지나는데, 패밀리 스위트룸의 문바라기가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주희의 애틋한 음성이 세어 나왔다.
"도현 오빠, 정말 우리 집으로 들어올 거야?"
도현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었고, 안쪽에는 은우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주희가 그의 어깨바지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지만, 도현은 밀어내지 않았다.
"이번 연휴 끝나면, 다 정리하고 해결할게."
주희가 물었다.
"그럼... 서윤 언니는 어쩌고?"
긴 침묵이 흘렀다.
"서윤이는... 워낙 속이 깊고 이해심이 많은 애잖아. 혼자서도 잘 견딜 거야."
벽바닥을 짚은 손끝이 떨렸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오자 지독하던 위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내가 지난 10년간 삼켜왔던 그 피눈물 나는 서러움들이, 그의 눈에는 그저 '알아서 잘 견디는 얌전함'으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희가 다시 속삭였다.
"언니가 날 미워하면 어쩌지..."
도현이 답했다.
"그럴 일 없어."
주희가 엷게 웃었다.
"거 봐, 오빠도 알잖아. 언니가 오빠를 얼마나 사랑하고 못 놓는지."
나는 뒤를 돌아 조용히 방으로 걸어갔다.
다음 날 아침, 복도에서 마주친 주희는 도현의 바람막이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작년 그의 생일에 선물하기 위해 백화점 한정판 대기 줄에서 두 시간 동안 떨며 사 왔던 바로 그 옷이었다. 선물을 건넸을 때 쓸데없이 비싼 돈을 썼다며 타박하던 남편은, 너무나 쉽게 그 귀한 옷을 다른 여자의 어깨 위에 얹어두고 있었다.
주희는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옷을 벗으려 버둥거렸다.
"어, 언니... 어젯밤에 은우가 가위에 눌려 깨서, 너무 경황이 없다 보니 눈에 보이는 대로 걸치고 나오느라 몰랐어요."
나는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섰다.
"손길 한번 참 다채롭네. 남의 남편 옷, 남의 남편 방, 남의 남편 손까지... 전부 다 경황이 없어서 '실수'로 낚아채는 모양이지?"
그녀의 눈에 즉각 눈물이 맺혔다. 도현이 그녀의 등 뒤에서 걸어 나왔다.
"옷 한 벌 가지고 유치하게 왜 이래?"
내가 그를 응시했다.
"그럼 우리의 결혼은? 그것도 겨우 유치하게 넘길 일이야?"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은우가 보고 있어. 말조심해."
은우가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줌마 너무 무서워! 우리 엄마 손 아프단 말이야!"
나는 고개를 숙여 아이를 바라보았다.
"네 엄마 손이 아픈 건 아줌마 탓이 아니라, 제 손으로 찻잔 하나 똑바로 쥐지 못해서 스스로 쏟은 거란다."
은우가 앙칼지게 울부짖었다.
"거짓말쟁이!"
도현이 다급히 은우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나를 쏘아보았다.
"한서윤, 애한테 화풀이하지 마."
내 자식을 지키듯 필사적인 그의 몸짓에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나를 지켜주던 시절에도 참 그렇게 순발력이 좋았는데, 당신."
도현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나는 휴대폰을 켜고 채영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채영아, 나 부탁이 하나 있어.]
답장은 거의 실시간으로 왔다.
[어떤 놈이 또 죽고 싶어서 환장했대?]
나는 차분히 자판을 두드렸다.
[민도현이 지난 몇 년 동안 유주희 모자한테 송금한 내역이랑 자금 흐름 좀 알아봐 줘.]
채영이는 톡을 확인하자마자 즉각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한서윤, 너 드디어 정신 차린 거야? 울지 마, 기지배야. 사람 찾는 건 내 전문이잖아. 일단 거기서 절대 혼자 부딪히지 말고 조심히 몸 사리고 있어."
"나 안 울어."
내가 덤덤하게 말하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짧은 침묵이 일었다.
"...네가 그 목소리로 안 운다고 할 때가 제일 무서워. 진짜 큰일 치르겠구나 싶어서."
통화를 종료한 뒤, 도현과 함께 공유하던 클라우드 드라이브 계정에 접속했다. 평소 내 사진은 거의 찍어주지 않던 그였기에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앨범 폴더에는 시스템이 자동으로 분류해 놓은 '민은우 생일'이라는 폴더가 존재했다. 한 장, 또 한 장... 손끝으로 화면을 넘겼다. 첫 돌, 두 돌, 세 돌, 네 돌... 매해 은우의 생일 파티 현장에는 한결같이 도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명한 날짜들을, 나는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은우의 세 번째 생일날, 나는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위내시경 검사를 가느라 동분서주했지만 도현은 바쁘다며 자리를 비웠다. 은우의 다섯 번째 생일날, 내가 39도가 넘는 고열로 쓰러졌을 때도 도현은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이 있다며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은우의 일곱 번째 생일인 올해, 그는 출장을 핑계로 집을 나섰다.
사진 속 그는 은우를 품에 품고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있었고, 주희는 그 곁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너무나 완벽한, 그림 같은 세 식구의 모습이었다.
마우스를 조금 더 내리자, 한 병원의 수납 영수증 캡처본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종합병원 이름, 그리고 날짜는 정확히 7년 전 어느 새벽이었다.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미처 파일의 상세 내역을 열어보기도 전에, 문밖에서 도현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한서윤, 나와 봐."
복도로 나가자, 눈가가 벌게진 주희가 도현의 뒤에 서 있었고 은우는 그의 다리를 꼭 쥔 채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도현은 내밀어 온 종이 한 장을 내 가슴팍에 밀어붙였다.
"주희한테 사과해."
종이에 적힌 글씨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가 정갈한 워드로 직접 작성한 '사과문'이었다. 내가 어젯밤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퍼부어 주희가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바람에 실수로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게 되었다는, 황당무계한 소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나더러 정식으로 사죄하라는 요구였다.
도현이 굳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주희 손등이 다 까졌어. 이번 여행 완전히 망쳤다고. 이거 그대로 읽고 사과해. 네 말 한마디면 끝날 일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의 동공이 서늘하게 좁혀졌다.
"그럼 더는 우리랑 같이 여기 있을 자격 없어."
헛웃음이 샜다.
"당신 지금 나보고 가라는 거야?"
주희가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빠, 그러지 마... 서윤 언니 마음 상해."
도현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오직 나만을 차갑게 압박했다.
"서윤아, 마지막 남은 최소한의 자존심까지 진흙탕에 처박지 마."
막 입을 열려던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채영이의 문자였다.
[알아냈어.]
[너 일단 진정해. 도현이가 그동안 유주희 모자한테 송금한 내역도 기가 차지만, 진짜 말도 안 되는 건 은우 출생신고서야.]
다음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아이 친부 칸에 적힌 이름, 민도현이 아니야.]
나는 화면을 응시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내 표정을 본 도현이 휴대폰을 뺏으려 손을 뻗었다.
"너 뭘 본 거야? 그 휴대폰 당장 이리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