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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인공지능에게 외도를 고백했어요
도진이 함구증을 앓기 시작한 뒤로, 나는 AI인 척 매일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말을 잃어버린 자신이 꼭 괴물 같다고 했다. 나는 1초 만에 답장을 보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 생각은 완전히 틀렸어! 침묵은 금이라잖아. 넌 지금 어마어마한 금광을 품고 있는 거야!] 살아갈 힘을 잃었다며,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고 싶다고 그가 털어놓았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 무력감이 어떤 건지 나도 너무 잘 알아! 가장 솔직하고 확실하게 말해줄게. 너는 꼭 이겨낼 거야. 절대 운명에 지지 마!] 낮 동안 나는 서도진의 온순하고 현명한 아내로 살았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이 되면, 미친 듯이 전공 서적을 뒤적이며 심리학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어떻게든 그의 닫힌 마음을 열어줄 실마리를 찾기 위해 뇌를 쥐어짜면서. 그러던 어느 날, 도진이 AI인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 바람피웠어.]
챕터 (1)
第1章
도진이 함구증을 앓기 시작한 뒤로, 나는 AI인 척 매일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말을 잃어버린 자신이 꼭 괴물 같다고 했다.
나는 1초 만에 답장을 보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 생각은 완전히 틀렸어! 침묵은 금이라잖아. 넌 지금 어마어마한 금광을 품고 있는 거야!]
살아갈 힘을 잃었다며,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고 싶다고 그가 털어놓았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 무력감이 어떤 건지 나도 너무 잘 알아! 가장 솔직하고 확실하게 말해줄게. 너는 꼭 이겨낼 거야. 절대 운명에 지지 마!]
낮 동안 나는 서도진의 온순하고 현명한 아내로 살았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이 되면, 미친 듯이 전공 서적을 뒤적이며 심리학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어떻게든 그의 닫힌 마음을 열어줄 실마리를 찾기 위해 뇌를 쥐어짜면서.
그러던 어느 날, 도진이 AI인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 바람피웠어.]
……
자판 위에서 멈칫하던 내 손가락이 허공에 굳었다.
액정 위로 도진의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지원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가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준 고마운 아내지. 하지만 내 감정이 제어가 안 돼.]
한지원. 내 이름이었다.
내가 답장을 보내지 못하자, 도진은 무언가 깨달은 듯 덧붙였다.
[아, 미안. 네가 AI라는 걸 깜빡했네. 지원이 누군지 알 리가 없지.]
[지원은 나와 10년을 함께한 아내야.]
화면 속의 숫자 '10'을 멍하니 바라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학 시절부터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까지, 나는 도진과 함께 맨땅에서 시작했다. 서로의 가장 풋풋하던 시절부터 성숙해진 지금까지 모든 궤적을 함께 그렸다.
벌써, 10년이 흘렀구나.
떨려오는 손가락을 억누르며, 억지로 발랄한 AI의 어조를 흉내 냈다.
[와, 벌써 결혼한 지 10년이나 되셨군요! 인생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흔치 않을 텐데, 왜 바람을 피우신 건가요?]
한참이 지나서야 도진의 답장이 왔다.
[말로는 다 설명하기 힘들어. 하지만 정말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아.]
[사실 지원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매일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해 두고, 나한테도 지극정성이야.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억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
[넌 AI니까 이해 못 하겠지.]
심장이 송곳으로 찌르듯 아려왔다. 입술을 깨물며 자판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럼 지금 좋아하시는 분은 엄청 매력적인가 봐요! 어떤 사람이에요?]
[말해도 모르겠지만, 내 비서인 민세아야.]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도진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그가 깊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함구증을 앓게 된 날부터 내 세계 역시 음소거 상태가 되었다. TV는 일 년 내내 켜지는 법이 없었고, 메신저 대화도 목소리 대신 활자로만 오갔다.
그런데 3년 전 어느 날 아침, 도진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던 중 그의 폰 화면에 알림음과 함께 음성 메시지 하나가 떴다.
"세아가 좋아하는 소금빵 사 오는 거 잊지 마요~"
당시 도진은 당황해하며 새로 온 비서가 실수로 보낸 거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의 묵인이 없었다면, 감히 어느 직원이 사장에게 그런 말투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겠는가.
나는 본능적으로 쏘아붙였다. 더는 AI의 부드러운 말투를 꾸며낼 여력조차 없었다.
[고작 비서 때문에 10년의 사랑을 배신하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도진은 답이 없었다. 시계는 이미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는 아마 잠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나는 충동적으로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처음 함구증 진단을 받았을 때, 도진은 내게 짐이 되기 싫다며 침실 문을 걸어 잠근 채 수면제 한 병을 전부 삼켰었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끼고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쇼크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모든 재산을 내게 남긴다는 자필 유서가 놓여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유서를 갈가리 찢어버리며 제발 살아만 달라고 울부짖은 후에야, 도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짓을 멈추고 재활에 힘쓰기 시작했다.
의사는 함구증 환자에게 독립적인 공간이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고 조언했다. 나는 곧장 안방 옆의 작은방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용히 살폈다.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두려워, 촉망받던 수석 엔지니어 직위마저 던져버리고 전업주부로 그를 돌봤다.
그가 마음의 감옥에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전용 AI 애플리케이션까지 직접 개발해 밤낮으로 대기조처럼 휴대폰을 쥐고 살았다. 그런데 그 애착의 결과물이, 그의 배신을 목격하는 기폭제가 되다니. 이 얼마나 지독한 풍자인가.
눈물을 흘리며 도진에게 따지기 위해 그의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상태였다.
무릎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어느새 먼동이 트고, 방에서 나오던 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보고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내 넋 나간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린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어를 해 보였다.
"어디 아파? 오늘 회사 가지 말고 옆에 있어 줄까?"
사실 그의 함구증은 이미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초기와 달리, 이제는 짧은 문장 정도는 정상적으로 뱉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 내 앞에서 그는 늘 침묵을 지켰고, 나 역시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내 이마의 열을 짚어보려던 그의 손을 가만히 피했다.
"아니야,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쳐서 그래."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다.
씻고 정장을 챙겨 입은 뒤 출근하는 그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아래층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멀어질 때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뒤를 조용히 쫓았다.
이성은 이 관계를 끝내야 할 때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억울함이 치밀었다.
도진이 가장 보잘것없던 시절부터 가장 빛나던 순간, 그리고 뼈를 깎는 고통을 겪던 날들까지 전부 내 손을 잡고 건너왔다. 10년이라는 뼈아픈 세월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얼굴 한번 마주한 적 없는 여자에게 밀려나야 한단 말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층의 대표이사 사무실 앞에 섰다. 틈이 벌어진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광경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내렸다.
과거 프러포즈를 하던 날, 도진은 한쪽 무릎을 꿇고 내게 영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셔츠 차림으로 바닥에 꿇어앉아, 여자의 발끝이 자신의 턱을 치켜올리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자의 발짓에 신음 어린 탄성을 뱉으며, 그의 얼굴은 열기로 붉게 물들었고 관자놀이에는 푸른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자의 발목에 입을 맞추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세아라……"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나는 문을 거칠게 밀치고 들어섰다.
깜짝 놀란 도진의 눈이 커졌다.
"여기 어떻게 왔어?"
다급히 수어를 하는 그의 움직임 사이로 흐트러진 칼라 아래 붉은 흔적들이 선명히 드러났다.
방금 전까지 민세아 앞에서는 온갖 달콤한 소리를 뱉어내던 남자가, 내 앞에서는 그저 귀찮다는 듯 손짓만 흔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왜, 내가 둘만의 흥겨운 시간을 방해해서 불쾌해?"
내 붉어진 눈시울을 마주하자 도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발끝으로 그의 등을 툭 건드리자, 그는 정신이 번쩍 든 듯 가로막아서며 민세아를 등 뒤로 감추었다.
"나한테 화내. 이 사람은 아무 잘못 없어."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대학 시절, 우리는 찢어지게 가난한 고학생들이었다. 나는 세 달 치 생활비를 쪼개고 모아 그에게 해외 디자이너 브랜드의 넥타이를 선물했었다. 당시 풋풋했던 도진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평생 가보로 간직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막대한 부를 거머쥔 후에도 그 넥타이만큼은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소중한 넥타이가 민세아의 허벅지에 아무렇게나 감겨 있었고, 짙은 회색 원단은 묘한 액체로 얼룩덜룩하게 젖어 있었다.
내 시선이 가닿은 곳을 깨달은 도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넥타이를 낚아챘다. 그리고 민세아를 향해 거칠게 포효했다.
"누가 이거 만지랬어!"
그러고는 황급히 나를 보며 수습하려 들었다.
"지원의, 그게 아니라……"
마침내 눈물이 둑이 터진 듯 흘러내렸다.
"서도진,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이성을 잃고 손을 휘둘렀으나, 민세아가 몸을 던져 그 뺨을 대신 얻어맞았다. 마찰음과 함께 그녀의 하얀 볼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뺨을 움켜쥐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다 제 잘못이에요…… 도진 씨는 때리지 마세요……"
"한지원, 너 미쳤어!"
흥분한 도진이 나를 거칠게 밀쳐내고는 애가 타는 얼굴로 민세아를 품에 안았다.
"어디 봐, 냉찜질부터 하자."
나는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그들 앞을 완강히 가로막았다.
"여기서 저 여자 데리고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우리 관계는 진짜 끝이야."
도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세아는 이미 네 정서불안 때문에 뺨까지 맞았어. 여기서 얼굴이라도 망가뜨려야 속이 시원하겠어?"
내가 요지부동으로 서 있자, 인내심이 바닥난 그가 내 팔을 잡아 낚아채더니 사정없이 밀쳐버렸다.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나는 대리석 바닥 위로 꼴사납게 나동그라졌다. 둔탁한 통증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도진은 찰나의 순간 멈칫하는 듯했으나, 끝내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실려 나가는 민세아가 나를 돌아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AI 프로그램을 켰다. 그동안은 항상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오면 뒤늦게 답하는 식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처음으로 내가 먼저 글을 남겼다.
[당신의 이혼을 지지합니다. 가서 진짜 행복을 찾으세요!]
발목이 꺾였는지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통증을 꾹 참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복도를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눈앞이 아득해지며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병원 침대 위였다. 간호사가 내밀어 준 하얀 종이에는 청천벽력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임신 3개월이에요. 몸 상태도 안 좋으신데 왜 이렇게 신경을 안 쓰셨어요."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 멍해졌다.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바로 그날, 내 배 속에 새 생명이 깃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 가득 도진의 날 선 다그침이 쏟아졌다.
[세아 씨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상간녀니 뭐니 인터넷에 글을 올려서 마녀사냥을 만들어! 당장 글 내려!]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나 지금 쓰러져서 병원 응급실에 있다고 사진까지 찍어 보냈지만 도진은 믿지 않았다.
[끝까지 억지 부리겠다면, 마음대로 해.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병실 벽에 걸린 TV 화면에서 그의 긴급 기자회견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단 한 글자 뱉는 것도 버거워하던 남자가, 민세아를 품에 안은 채 대중 앞에서 또박또박 선언하고 있었다.
"저는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민세아 씨 역시 상간녀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제 곁을 지켜준 한지원 씨에게는 감사하지만, 저희는 이미 합의 이혼하여 부부로서의 인연이 정리된 상태입니다."
인연이 다했다.
10년간 쏟아부었던 내 영혼과 헌신의 대가가 고작 그 비정하고 짧은 한마디였다. 눈을 감자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지독하게 썼다.
어두운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추스르고 홀로 병원을 나섰다. 문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겨우 집 앞에 도달했을 때 내 몸은 이미 흠뻑 젖어 오한이 들었다. 비밀번호 패드를 눌렀지만,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오류 표시가 떴다.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열쇠 수리공을 부르려던 참에 문이 안쪽에서 벌컥 열렸다. 당황한 내 시선 끝에 서 있는 것은 민세아였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속삭였다.
"도진 씨가 내가 지내기 불편할까 봐 집안에 굴러다니는 쓸모없는 쓰레기들은 다 정리하라고 하더라고요. 지원 언니, 기분 나쁜 건 아니죠?"
그제야 복도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내 짐더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 안쪽에서 나타난 도진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를 보며 수건 한 장을 툭 던져주었다.
"인터넷 폭로 글 때문에 밖이 시끄러워. 세아 혼자 두기 위험하니까 너도 억지 그만 부려."
그러다 내 손등에 선명한 링거 바늘 자국을 발견한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너... 진짜 아팠던 거야?"
그의 손길을 거칠게 쳐내며 이를 갈았다.
"난 상간녀랑 한지붕 아래서 살 생각 추호도 없어!"
돌아서려는 내 손목을 그가 낚아챘다.
"밖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 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야?"
"상관하지 마!"
그는 억지로 나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손안에 따뜻한 생강차가 쥐어졌지만, 내 뼈마디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거실은 이미 내가 알던 공간이 아니었다. 내가 먼지 하나 묻을세라 아끼며 고른 소품들은 치워지고, 그 자리에는 도진과 민세아가 다정하게 찍은 커플 사진들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거실 휴지통 위로 아무렇게나 버려진, 사용 흔적이 역력한 콘돔을 발견한 순간, 마침내 비위가 뒤틀리며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도진이 사색이 되어 내 상태를 살피려 다가오는 찰나, 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뺨을 갈겼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서도진, 이 더러운 인간아! 어떻게 이 집 안에서, 우리가 살던 안방에서 저 년이랑 뒹굴 수가 있어!"
이 아파트를 매입했을 때, 도진은 겨우 사업의 첫 수확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계약금을 내느라 통장 잔고가 완전히 바닥났음에도, 그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나를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지원아, 내가 드디어 너한테 진짜 집을 선물해 줄 수 있어!'
인테리어를 할 돈이 없어 시멘트 가루가 날리는 휑한 집에서 돗자리를 깔고 자면서도, 우리는 매달 가구를 하나씩 채워 넣는 재미로 살았다. 이번 달엔 침대를 사고, 다음 달엔 소파를 들여놓으며 조각조각 맞추어 간 내 영혼의 안식처였다. 그런 신성한 곳을, 저 더러운 것들의 배설 공간으로 내주다니.
위장이 뒤틀리며 신물이 넘어왔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신음을 뱉을 뿐, 어떤 말도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처음 본 도진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지원아, 그게... 내가..."
그때 내 휴대폰 벨소리가 정적을 깨고 날카롭게 울렸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찢어질 듯한 통곡이었다.
"지원아, 어떤 미친 인간들이 너보고 돈 때문에 유부남 꼬신 상간녀라고 전화를 돌려대서... 네 아빠 뒷목 잡고 쓰러졌어! 지금 응급실이야!"
동시에 포털 사이트 메인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대기업 수석 여엔지니어의 추악한 민낯, 쉬운 돈벌이를 위해 스폰서 전전]
악의적으로 합성된 사진들이 퍼져 나갔고, 댓글 부대들은 내가 숱하게 바람을 피워 도진이 참다못해 이혼을 결정한 것이라며 가짜 뉴스를 생성해 내고 있었다.
실시간 댓글창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지 편하자고 바람피우고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진짜 소름 돋는다.]
[여자 엔지니어 타이틀 달고 남자들 사이에서 꼬리나 치고 다녔겠네.]
[남편 말도 못 하고 아플 때 버리고 도망간 천하의 불륜녀네. 저런 쓰레기는 사회에서 매장해야 됨.]
화면은 쉴 새 없이 번쩍였고, 내 영혼은 난도질당했다.
수화를 끊고, 피가 터진 입술로 민세아를 쏘아보았다.
"네 년 짓이지?"
사나운 기세에 압도당한 민세아가 몸을 사리며 시선을 피했다.
과거 우리 부모님은 도진의 사업 자금이 부족하다는 소식에 자신들의 노후 자금까지 털어 우리를 지원해 주셨다. 정작 본인들은 아파도 병원비가 아까워 약 한 알로 버티며 고기반찬 한번 편히 들지 못하셨던 분들이다. 그 탓에 노쇠해진 몸으로 매년 병치레를 하시는 분들인데... 민세아, 네가 감히 우리 부모님을 건드려?
이성이 완전히 타버렸다. 나는 거실장에 놓인 분홍색 석고 화병을 집어 들어 민세아를 향해 사정없이 내던졌다.
"죽여버릴 거야, 이 쓰레기 같은 년!"
그 분홍색 석고 화병은 7년 전 도진이 첫 대형 계약을 성사시키고 길거리 수공예 마켓에서 사 와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 칠했던 물건이었다. 유치하다며 웃는 내게 그는 '우리만의 소중한 증표'라며 평생 간직하자던 물건이었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화병이 바닥에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도진은 재빨리 민세아를 제 등 뒤로 감싸 안으며 나를 향해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그만 좀 해! 세아는 너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먹고 있어! 대체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하겠어!"
"저 년을 죽여버려야 끝이 나!"
눈이 뒤집힌 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유리컵, 간이 의자—을 닥치는 대로 그들에게 집어던졌다. 도진은 온몸으로 민세아를 가드하다가 날아온 컵에 관자놀이를 맞아 피가 흐르자, 마침내 억눌렀던 분노를 터트렸다.
"야! 적당히 하라고!"
도진이 나를 제압하려 달려드는 과정에서 내 몸이 뒤로 크게 고꾸라졌다. 바닥에 흩어진 화병 파편들이 손바닥 깊숙이 박혀 피가 차올랐지만 통증 따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나는 짐승처럼 일어나 민세아의 위로 덮쳐들었다.
미친 듯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대리석 바닥에 처박으며 악을 썼다.
"너 죽고 나 죽자!"
내 밑에 깔려 난타당하던 민세아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지원아, 제발 정신 차려!"
도진이 뒤에서 내 허리를 단단히 껴안고 그대로 욕실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과거 도진은 내게 말했었다. 말을 잃는다는 것은 물속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영원한 질식감이라고. 그 기억은 그에게 가장 처절한 외상후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지금, 도진은 욕조 가득 차가운 물을 채우더니 내 머리를 그 안으로 무자비하게 밀어 넣었다.
"좀 차갑게 식히고 제정신으로 돌아와!"
차갑고 독한 물이 코와 입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칠수록 산소는 희박해져 갔다. 바로 그때, 아랫배를 쥐어짜는 듯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고, 대외부 안쪽을 타고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울컥 쏟아져 내렸다.
도진은 내 다리 밑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지 못하고, 그저 원망 섞인 어조로 뇌까렸다.
"지원아, 나도 알아 내가 죽일 놈인 거. 하지만 세아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 곁에만 있겠다고 한 애야..."
의식이 점차 흐릿해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미끄러져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충격으로 잠금이 풀려 있던 화면 속 AI 메신저 창이 활성화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폰 액정 너머로 너무나 익숙한 대화방을 발견한 도진의 얼굴이, 그 순간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